우리는 상처받을까봐, 죽을까봐, 버려질까봐 두려워서 나를 세상에 던지지 못한다.
우리는 태어나서 내게 주어진 환경에서 적응하며 살아오면서 그 환경으로 인한 생각, 말, 행동을 하고 그것이 습관이 되어 내 경험과 상식 안에 살아간다. 그래서 그 경험과 상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새로운 자극이 오면 상처받기 싫어서 버림받기 싫어서 움츠리게 된다.
어제는 한 불자님이 전화를 주셨다.
연천군에 전화해서 절을 소개해 달라고 했더니, 우리 절을 알려주셨다고 한다.
지금 고민이 있어서 금강경을 읽으면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사정이 있어서 며칠만 쉬고 싶은데 그래도 되느냐는 질문이셨다.
내 대답은
고민이 있으면 그 원인을 찾아서 해결해야지 금강경 읽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 불자님은 부처님이 몇 분 계시냐는 둥, 절 위치가 어디냐는 둥, 금강경을 읽으면 되냐는 둥, 등등
본인의 인생, 본인의 고민에는 전혀 상관없는 질문만 하신다.
어디서 어떻게 불교를 접하고 어떤 말을 들었는지는 몰라도 본인의 삶과는 전혀 상관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인생의 나아갈 방향을 찾고 있다.
그런 불자님을 상대해야 하는 나로서는 참 안타깝고, 답답하다.
그 불자님도 오죽 힘들고 답답하면, 부재중 전화가 4통이나 왔을까.
다른 일을 하다가 부재중 전화가 왔음을 알고 다시 전화를 했고, 외근하다가 또 부재중 전화가 와서 다시 전화해서 길거리에서 오랫동안 통화를 했는데, 그 불자님은 본인의 간절한 마음과는 다른 말과 행동으로 본인의 고민은 해결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런 일련의 에피소드에서 나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 나 자신의 업을 바라본다.
아무리 내가 그 불자님을 제대로 불교의 길로 인도하고 싶어도, 못 알아듣는 사람으로 인해 안타까워 하고 가슴아파하더라도, 2500년 동안 부처님도 중생을 구제하지 못하신 것처럼 나 또한 진흙탕 속에 빠진 사람을 구할 능력은 없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하지만, 내 최선과는 상관없이 떠나가는 사람도 있고, 전화를 차단하는 사람도 있기에, 나 또한 상처를 받는다. 나도 사람이니까. 즉 나 또한 내 상식 내 경험에 사로잡혀, 내 진심어린 이야기에 동조하거나 언제 절에 오겠다는 말 없이, 내 말을 거절하는 듯한 반응에 상처를 받다 보니, 상대방이 듣지 않는 곳에서 상대방을 비난하는 생각을 한다. 나 자신을 보호하고 움츠러드는 생각이다.
어제 있었던 에피소드이지만 계속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 에피소드가 사마타의 테마처럼 내 업을 들여다 보고 있다는 증거다. 그렇게 일상생활을 하면서 내 업을 들여다보는 것을 우리는 라이프사마타라고 한다.
라이프사마타를 하면서 객관적인 시야로 내 업을 바라보니, 이럴 때 나를 세상에 던져야 함을 깨달았다. 상처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말과 행동을 못하고 움츠러들 게 아니라 부처님 세계로 뛰어들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보시가 아닐까.
보시란, 사전적으로는 남에게 자비심으로 재물이나 불법을 베푼다고 되어있다. 그런 행동을 하게 되면 저절로 세상에 뛰어들 수 있게 되기 때문에 보시를 하라고 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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