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태황사 방모다

군맹서진스님과의 만남

공부하는아이 2025. 3. 5. 14:12

나는 인천에서 말단 경찰이셨던 아버지와 무학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천하의 착한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샘은 많지만 무학이라는 열등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무학이다 보니 항상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을까봐 신경을 곤두세웠고, 실제로 바람도 여러 번 피우신 것 같다. 아버지는 자신을 올가메려는 아내로부터 도망치느라 바빴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쫒아다니느라 바빠서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은 항상 내팽개치기 일쑤였다. 그런 두 분 사이에서 태어난 나는 샘도 많고 남에게 지기 싫어하면서도 천성은 착한 아이였다. 집에는 항상 나 혼자였고, 학교에 다녀와서 혼자 밥 먹고 혼자 잠들곤 했다. 부모님이 집에 계실 때에는 항상 부부싸움으로 나는 혼자 있는 게 더 좋았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서, 빚 독촉 전화는 매일 오고 부모님이 계셔도 안 계시다고 거짓말을 해야 했다.
그런 상황이 너무 싫어서 집을 뛰쳐 나가고 싶어서, 하루는 아무 말없이 인천을 떠나 멀리 갔다. 어디로 갔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중학생이었던 나로서는 꽤 멀리 갔던 것 같다. 하지만, 목적지도 없고 돈도 없고 뭘 해야 할지도 몰라서 그냥 집으로 돌아왔던 것 같다. 그러고 나서도 가출하고 싶은 생각은 몇 번 더 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내가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게 엄청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가출생각은 떨쳐버리고, 그때까지도 성적이 좋았지만 더욱 공부에 매달렸다. 이 지긋지긋한 환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공부 뿐이고, 내 삶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것 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나서부터는 잠도 잘 오지 않아 더욱 공부에 매달릴 수 있었고, 반에서 1, 2등 하던 것이 전교 5등 안에 들게 되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부모님의 부부싸움은 더욱 격해졌고, 경제적으로는 더더욱 나빠져 고3때는 세 번이나 이사를 해서 고3 첫 모의고사에서는 서강대에 들어갈 수 있는 점수였던 것이, 점점더 추락하더니 결국 천안에 있는 단국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1학년 1학기 때 나온 성적 덕분에 나는 들어가기 어렵다는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었고, 지긋지긋한 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원하는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게다가 장학금까지 받게 되니 나를 바라보는 교수님들이나 조교들의 시선도 달라짐을 경험했다. 이렇게 나는 점점 업그레이드 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선배들이 “네가 우리학교 대학원에 가더라도 다른 대학원에도 시험을 봐라. 그래야 네 수준을 알게 된다.”는 조언으로 이대 대학원 시험을 보게 되었다. 오전에 필기시험을 보고 오후에 면접을 보는데, 총 질문 4가지 중에 세 번째 질문은 4학년때 배웠던 양자역학에 대한 질문이었는데 나는 “양자역학에 대한 질문은 배운지 얼마 안되서 충분히 대답할 수 있지만, 지금은 너무 긴장이 되서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했고, 마지막 질문은 지구의 공전궤도는 타원형이라고 알고 있는데 만약 아니라면 어떨 것 같으냐는 질문이었고, 나는 “찌글찌글할 것 같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긴장이 되서 잘 설명이 안된다”고 대답했다. 이때의 경험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날 정도로 내 인생에 아주 중요하고도 충격적이고 가슴 뛰는 사건이었다. 그렇게 시험을 보고 나는 단국대로 돌아왔고, 며칠 후 집으로 이대 대학원으로부터 합격통지를 받았지만, 나는 이미 단국대 대학원에 입학금을 낸 후였고, 선배 중에 이대 대학원으로 가서 교수님들에게 찍힌 선배가 있음을 알고 있던 터라 이대 대학원으로의 입학은 포기했다.
단국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즉시 취업준비를 했고, 그때는 모든 대기업이 같은 날 입사시험을 봤기 때문에 어디로 들어갈지 정해야 하는데, 그때 당시는 현대가 제일 큰 회사여서 현대에 입사시험을 봤고 불합격되었다. 그 이후로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30군데 정도 이력서를 넣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에어컨회사에 들어갔는데, 집에서도 가깝고 꽤 중견회사여서 나름 괜찮았던 것 같았다. 하지만, 전혀 모르는 용어도 많고 에어컨 디자인도 해야 해서 전혀 새로운 일을 하다보니 전공을 살릴 수 있는 회사로 이직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반도체 관련 회사로 이직하려는 생각으로 찾아보던 중에, 현대 계열사와 거평 계열사 중에 선택을 해야 할 때 나는 업무 자체보다는 더 인지도가 있는 회사를 선택하게 된다. 그래도 입사를 해서 원래의 습성대로 열심히 그 일에 적응해보려고 애쓰면서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회사에 있으면서 그 일에 몰두하다 보니, 사장 이하 임원들에게도 인정받았다. 그러다가 IMF가 와서 구조조정할 때 많은 여직원들이 권고사직을 당했는데, 나는 다른 팀으로 흡수되어 근무하다가 연구소로 보내달라고 요청하니 연구소에는 자리가 없고 QA로 발령받게 된다. 그곳에서도 전혀 새로운 일을 하게 되고, ISO9000 을 획득하기 위한 회사전체 시스템 구축업무를 하게 되었고, 그곳 부서에서도 처음에는 충원을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가니까 탐탁지 않게 여기다가 성과를 내는 모습을 보고 점차 인정하는 분위기가 되어 중요한 업무를 맡기기도 했다. 그러다가 건강상의 이유로 그곳도 퇴사하게 되었다.
퇴사한 이후, 건강을 돌보느라 한동안 쉬다보니 앞으로의 삶을 고민하게 됐다. 이것저것 아르바이트와 번역일을 하면서 고민하던 중, 불교출판사 사장님의 소개로 수유리의 서원사라는 절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출판사 사장님과 함께 서원사에 갔었고, 그 다음에는 서원사에서 공부하시는 스님이 출판사에 몇 번 방문하셔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가 그 출판사 사장님이 나를 오해하게 되어 그곳에서도 나왔는데, 갑자기 서원사라는 절에 가볼까 하는 마음이 생겨 방문했는데, 주지스님과 상담을 시켜 주셨다. 그때 나의 고민을 말씀드리게 됐고, 절에서 공부를 하다보면 해결방법을 찾게 될 것이라는 대답을 들었지만, 지금은 스터디모임이 만들어지지 않았으니, 만들어지게 되면 연락주겠다고 하셔서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소개해주신 스님께서 내게 전화하셔서, 주지스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지금이라도 당장 공부하러 들어와도 된다고 하셔서 그 다음날 다시 서원사에 방문했다. 그랬더니 주지스님께서는 스터디모임이 만들어지면 오라고 했는데, 왜 벌써 왔느냐고 하시면서 매우 당황해 하셨다. 그래서 나는 사실 다시 집으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소개해주신 스님이 그래도 빈 방도 많고 이렇게 오셨으니 스터디모임이 생길 때까지 있어도 되지 않겠느냐며 나를 붙잡았다. 그러자 주지스님께서도 마지못해 그러라고 하셨고, 빈 방을 내주셨다.
그렇게 서원사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2일째 되던 밤 늦게 주지스님께서 난감한 표정으로 내 방을 찾아오셨다. 지금은 때가 좋지 않으니 집에 가있으면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하셨고, 다음날 귀가하라는 말씀이셨다. 그때부터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뜬눈으로 밤을 새다가 전철 첫차 시간에 맞춰 서원사를 나왔다. 아침 이른 시간에 집에 온 나는 엄마에게 아무 것도 묻지 말고 그냥 내버려두라는 말만 남기고 쓰러져 잠에 빠졌다.
나는 단지 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찾아갔고, 거기에서 공부를 하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는 말만 듣고 간 건데, 도대체 무슨 이유로 내쫒겨야 된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그러다가 며칠 후, 주지스님으로부터 전화가 왔고,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스터디모임이 생길 때까지 공부할 수 있는 방법으로 주지스님의 법문을 편집하는 일을 제시하셨고, 내 생각에도 편집하면서도 그 내용을 상세히 들어야 하니 공부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1주일에 한번씩 서원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새로운 일을 받고 다된 편집본을 건네드렸다. 그런데 그 자리에 주지스님의 아이들이 함께 나왔고,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도 들었다. 주지스님은 결혼하신 분이고 내가 서원사에 가기 1달쯤 전에 부인이 돌아가셨고 그런데, 내가 서원사에 가자 주지스님의 어머니가 나를 꽃뱀으로 오해하시게 되어 그렇게 되었다는 설명이었다. 그 말씀을 듣고 나는 화가 난다기 보다는 좀 얼떨떨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고, 단지 내 미래를 찾을 생각 뿐이었고, 결혼이나 연애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내게 생긴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몇 달을 지내다가 주지스님의 어머니가 연천이라는 곳의 절로 가셨고 이제는 안 오실 것이며, 스터디모임도 생겼으니 오라고 하셔서 다시 서원사에 들어가게 됐고, 이제부터는 공부도 하고 불교잡지 편집회의도 하면서 모인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모임 중에 한 친구가 주지스님께 질문을 했다. 주지스님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주지스님은 이 세상을 불교랜드로 만들고 싶다면서 모든 사람들이 괴로움없이 행복한 삶,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맘껏 도전하고 실패하면서 뜻을 이뤄가는 삶을 살도록 하고 싶다는 내용의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진짜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나도 그런 세상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고 발가락 하나라도 담궈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서원사의 일원이 되었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편집회의와 포교에 대한 회의나 활동에도 열중했다.
서원사는 주지스님의 선친이신 효란큰스님의 소원대로 재가불교를 실행하는 사찰이어서, 공부하시는 스님들의 가족들이 같은 건물에 함께 살고 있었다. 그래서 주지스님의 아이들도 함께 살고 있었는데, 주지스님의 아이들은 사찰 정문을 통해 출입하다보니 스님들과 신도들이 회의하거나 식사를 하거나 할 때도 아이들은 그 광경을 보며 지나다니곤 했다. 그렇게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고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아이들은 나와 더욱 친해졌다. 그러다보니 주지스님과 아이들은 공적인 장소에서 뿐만 아니라 사적으로도 함께 하게 됐고, 그러던 어느 날 주지스님은 추석을 함께 지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하셨다. 대중들이 모여있는 서원사를 떠나 아이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에서 연휴를 보내고 싶다고 하셨고, 나는 예전에 회사 다닐 때 워크샵으로 갔었던 비발디파크를 생각해냈고, 주지스님과 아이들은 너무 좋아라 했다. 2박3일의 일정으로 갔는데, 아이들과 주지스님은 아직 사별의 아픔을 치유받지 못한 상태여서 나에게 많은 의지를 했다. 숙소를 예약하고 아쿠아월드의 티켓을 사고 식사준비와 아이들 케어까지 마치 엄마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아직 만3세밖에 안되는 막내는 나한테 엄마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우리는 2박3일을 진짜 가족처럼 서로 보듬고 의지하면서 보냈다.
그렇게 여행을 다녀온 후로, 우리는 다시 남남으로 돌아가야 했고, 대중들이 있는 곳과 우리들만의 공간에서 서로 다르게 행동해야만 했다. 하지만, 주머니 속의 칼은 밖에서도 두드러지듯이, 우리들의 행동은 어딘가 어색했고 대중들은 서서히 분위기가 다름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서원사 스님들과 신도들이 돌아가신 방모님(주지스님 부인)의 친정인 일본의 광전사를 도와주러 가기로 하여 그 인원에 내가 포함되어 가게 되었다. 통역하러. 4박5일의 일정으로 일본에 다녀오는 동안, 주지스님은 나를 안채로 받아들일 생각을 하셨고 아이들과 서원사 식구들에게도 공표를 하셨다.
그렇게 나는 스님의 아내, 방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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