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방모님으로부터 꽃뱀으로 낙인 찍힌 나를 서원사로 들어오게 할 수 없었던 주지스님은 아이들과 내가 함께 지낼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서원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집을 마련하려고 하셨는데 자금이 부족하여 나도 보탰다. 그렇게 도망치듯이 우리는 노원구에서 살면서 주지스님은 수유사거리에 불교문화센터를 세워 활발하게 포교활동을 하셨다. 그 무렵에 제자로 들어온 각비스님과 함께, 그동안의 불교수행방법에서 벗어나 현대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드셨다. 그 대상은 주로 이전 직업이 선무도 사범이었던 각비스님에게 선무도를 배웠던 사람들이 각비스님의 소개로 하나둘씩 참여하게 되었고 점점 그 지인들에게로 퍼져갔다. 사실 그때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고 그 당시에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사람들은 임상실험의 대상자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때도 여전히 월간 본원이라는 잡지가 활발히 발행되고 있어서 그 잡지를 보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했다.
처음에 노원구에 이사했을 때는 아이들과 친해지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불교문화센터에는 가지 않고 집에서 전업주부로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아침준비를 해서 주지스님과 아이들을 직장과 학교,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면, 나는 늦은 아침을 먹고 집안 청소를 했다. 그러고나서 은행에도 가고 주변을 다니며 필요한 것도 사고 아이들 간식과 저녁 장을 보고 집에 오면 어느새 둘째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 된다. 나중에 들어보니 둘째는 서원사에서 살 때는 학교 끝나면 친구들과 학교앞 분식집에서 떡볶이 등 간식을 사먹고 서원사 근처에 있는 놀이터에서 한참 놀다가 귀가하곤 했는데, 새로 전학 간 학교에서는 아직 친해진 친구도 없고 근처에 놀이터도 없어서 곧장 집으로 왔다고 한다. 나는 반갑게 맞이하면서 둘째가 좋아할 만한 간식을 해주고, 함께 피아노를 치거나 퍼즐을 맞추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 나면 첫째가 귀가를 하고 막내를 데리러 둘째와 함께 막내를 데리러 어린이집에 가면, 막내는 신나게 놀고 있다가도 너무 좋아라 하며 뛰어나온다. 그렇게 셋이서 손잡고 노래부르기도 하고 조잘조잘 떠들기도 하면서 귀가한 후에 주지스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같이 저녁을 먹었다. 이렇게 서서히 주지스님의 가족 속에 스며들어 갔다.
그러나 항상 이렇게 따뜻하지만은 않았다. 한 번은 둘째가 거짓말 한 것이 들통나서 아이 손바닥을 때린 적도 있었고, 중학교에 들어간 첫째가 나를 엄마로 부르기를 힘들어해서 주지스님으로부터 크게 혼난 적도 있었고, 첫째가 너무 돈 개념이 없어서 아이의 나이로서는 큰 금액의 미술용품을 사와서 내가 크게 혼낸 적도 있었고, 신도 중에 돌아가신 방모님과 가깝게 지내던 분이 애들이 보고 싶다며 찾아와서는 내게는 눈인사조차도 안 하고 집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녀 너무 큰 상처를 받은 나는 음료수를 사오겠다는 핑계를 대고 한참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신도가 가고나서야 집에 들어간 적도 있었다.
노원구에서 사는 동안 나는 처음으로 임신이라는 것을 하게 됐다. 사실, 주지스님과 가까워지면서 나는, 결혼을 해도 되는 걸까 하고 고민을 했다. 그럴 때마다 주지스님은 내가 왜 망설이는지를 물으셨고, 나는 아이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내 목숨을 던져서라도 아이들을 구할 수 있어야 진짜 엄마인데 내가 과연 그럴 수 있을 수 있을지 그리고 내가 임신을 하여 내 아이를 낳게 됐을 때 과연 그 아이와 위의 아이들을 차별하지 않고 키울 수 있을지 의문이 간다고 대답했다. 주지스님은 그런 고민을 하는 나야말로 충분히 아이들의 엄마가 될 수 있다고 하셨는데, 나는 궤변처럼 들렸다. 하지만, 주지스님은 나를 충분히 납득시켜 주셨고, 아이들도 모두 승낙해줘서 노원구로 이사하게 된 것이었고, 아이들의 동생도 생기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6개월 정도의 노원구에서의 생활은 끝이 나고, 우리는 다시 서원사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 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절생활이 시작되었고, 주지스님의 선친이신 효란큰스님을 모시며 며느리로서의 삶도 추가되었다. 그러면서 점점 배도 불러서 내 아이도 출산하게 됐고,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져서 서원사와 불교문화센터는 공부하러 오는 신도와 스님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사람들로 꽉 차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가정과 절 모두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자꾸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고 결혼하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나도 인생치유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었다. 내가 인간관계가 힘든 것은 사람들로부터 상처받기 때문인데, 그 원인은 부모로부터 보호받지 못했고 엄마의 열등감이 학습된 것이었다. 진단이 나오고 치유하던 중에 나는 심정지가 왔다. 그때는 새로 태어난 막내의 돌잔치를 한지 5일 지난 날이었고, 쓰러지고 약 20시간 후에야 의식이 돌아왔는데 심정지의 원인을 찾지 못한 채로 퇴원했다. 의식은 돌아왔으나 일상생활은 할 수 없는 상태여서 시어머니와 친정엄마가 함께 나를 대신하여 아이들을 돌보고 나는 강원도 양양으로로 요양을 떠났다. 그곳에서 4주 정도를 지냈는데 그곳에서 뭘 하면서 지냈는지 지금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북한에서 서해로 미사일을 쐈다는 뉴스를 보고 큰 전쟁이 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어 빨리 애들 곁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에 회복되지 않은 채로 돌아왔다.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주지스님은 이사를 가자고 했다. 주지스님은 서원사가 아닌 경기도 연천에 있는 오봉사로 가야 하는데, 애들 교육 문제도 있고 하니 노원구나 연천 근처로 이사를 가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노원구의 아파트는 우리 형편에 갈 수가 없고 동두천에는 외국어고등학교가 있으니 거기라면 애들이 뒤처지지 않게 키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동두천에 우리가 살 집을 마련했다.
사실 서원사에서 방모와 주부를 함께 했다고는 하나, 방모는 생소한 직업(?)이고 집안일도 거의 안해봐서 죄다 처음 하는 것 투성이었다. 게다가 무슨 일이든지 차근차근 배운다든지 조금 생각할 여유가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심사숙고해서 한다기 보다, 매번 사건이 생기고 일이 던져져서 마치 아무 기초도 안 되어있는 채로 링에 내던져진 권투선수가 시합 내내 얻어맞기만 하는 것처럼 허둥지둥 메꾸기 일쑤였다. 아침에 눈뜨자마자부터 얻어터지기 시작해서 밤에 침대에 들어갈 때까지 잠시도 쉬지않고 집에서나 절에서나 피멍투성이가 되었다. 잠자는 시간조차 편안치 않았다. 낮에 저질러 놓은 일을 남편은, 내가 왜 그랬는지 파고들고 다시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 때까지 나를 종용했다. 그것이 새벽 3~4시까지 이어진 적도 많았다. 서원사에서 지낼 때 인생치유프로그램을 진행하다가 심정지가 와서 끝까지 완료하지 못했고, 타인으로부터 상처를 받게 되면 내면으로 파고드는 습관이 있어서 절이나 남편이나 아이들에게 상처를 받으면 구석을 찾아 파고들고 벽을 치기 때문에, 남편은 남편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나의 그런 행동으로 인해 또 상처를 받게 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런 말과 행동이 신도들과 스님들에게도 일삼게 되어 그들로부터 불만이 나오고 그러다가 떠나가기도 했다.
더 큰 일은 주지스님과 함께 인생치유프로그램을 만들었던 각비스님마저 다른 길을 가게 되자 주지스님은 낙담이 컸고, 접근성이 떨어지는 연천에서는 도저히 포교도 되지 않아서 경전강의나 인생강의도 서울에서 장소를 빌려서 열면서 재건을 꾀했으나 점점 어려워지기만 했다. 그러는 와중에 나는 근본적인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왜 스님과 결혼했고,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일까? 막연하게나마 중요한 키를 내가 쥐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게 무엇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수가 없었다.
각비스님의 소개로 인생치유프로그램을 진행했던 사람들 중에 부부 모두 한 경우가 많았는데, 그 중에 한 부부는 태황사 종무실 직원으로 일 한 적이 있었다. 남편분은 주로 절 관리 분야의 일을 하였고, 아내분은 포교와 신도관리 분야의 일을 하였다. 그래서 스님들과 포교와 신도관리에 대한 회의에 아내분이 동석하여 여러가지 아이디어도 내고 이벤트도 기획하다가 내 문제로 주지스님께 불만을 토로하였는데, 나와는 일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법회가 있을 때 내가 신도분들에게 무례하게 한 때가 있었는데, 그때 주지스님께서 나를 크게 나무랐고 그 모습을 보고 신도들이 많이 불편해했다. 그 외에도 신도들이 나에 대한 불만을 주지스님께 토로한 주요 내용은, 방모라고 하면 신도들을 어머니처럼 보듬어줘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 나름대로는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도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심장이 멎는 바람에 중간에 멈춰졌던 인생치유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다시 진행해서 방모가 되기 위한 AS를 진행하여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초보 방모 정도가 되었을 무렵, 2018년에 서울 방배동에 불교대학을 열어 인생치유프로그램(업장소멸프로그램)을 홍보하여 라이프너즈 역할까지 하게 됐다. 그 또한 처음으로 만들어진 직업이다 보니,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불교대학을 시작하여 주지스님은 어떻게든 알리려고 불교대학 주변을 구석구석 다니시면서 전단지도 돌리고 포스터도 붙이셨는데, 나는 아무 것도 안 한 채 사무실에만 쳐박혀 있고 시계바늘처럼 출퇴근만 했다. 그러다가 각비스님이 지인들을 소개해줘서 인생강의를 시작하게 되어 그들과 함께 홍보활동의 일환으로 영상을 만들어 유튜브에 올렸으나 아무 효과가 없었고, 전단지와 포스터도 아무 효과가 없었다. 그러다가 첫째를 영입하여 홍보활동을 벌이고 우연히 큰 광고업체에서 누구라도 알 수 있는 광고를 만들었던 분을 알게 되어 약 3개월 동안 서울 시내의 문화센터에서 강연회를 열고 그것을 불교방송에도 내보냈으나 불교대학으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에 어떻게 하면 태황사와 불교대학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 라는 주제로 사마타(일종의 명상기도)를 했더니, 부처님의 몸을 이용하라는 소리가 들려 태황사(구.오봉사)에서 석가모니부처님 진신사리 친견법회를 열기로 하고 유튜브에 홍보하기 시작했는데, 전국에서 친견하고자 하는 불교신도들이 몰려왔고 진신사리탑 건설에 시주하겠다고 전화가 빗발치게 쏟아졌다. 그래서 우리는 서울과 연천을 오가면서 매월 친견법회를 약 2년여 동안 지속했고, 그렇게 찾아온 신도분들 중에서 인생치유프로그램을 하는 사람도 생겼다. 그리고 홍보활동도 활발하게 하여 문의전화가 끊이지 않아, 밥 좀 제대로 먹었으면 좋겠다는 행복한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그러던 중, 홍보와 라이프너즈 보조를 하던 첫째가 본인도 불교공부를 하고 싶다면서 강의도 열심히 듣고 인생치유프로그램도 하더니 출가를 해야겠다며 모든 것을 내던지고 운문사로 휙 가버렸다. 첫째의 케어를 받던 신도분들은 갑작스런 첫째의 출가로 인해 프로그램을 중도하차하는 분까지 생겼다. 세상으로부터 상처를 많이 받고 살아오신 분들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첫째의 불도저같은 케어로 많은 위로를 받고 치유되고 있던 터라 그 아이의 부재는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몸 사리지 않고 프로그램 진행자들에게 성심을 다해 케어를 했던 것처럼 본인의 삶도 더이상은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었던 첫째는 운문사에 가서도 3000배를 1주일간 하라는 미션에도 무릎이 망가지고 발바닥에 피가 나도록 후퇴하지 않고 해내는 모습에 모든 스님들이 감탄을 했다고 한다. 그랬던 첫째의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라이프너즈 역할을 수행했으나, 워낙 상처받는 업장이 큰 까닭에 첫째만큼 밀착케어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또다시 AS를 진행했고 조금씩 라이프너즈로서도 업그레이드 되어 갔다.
첫째가 운문사에서 행자생활을 마치고 강원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을 주지스님은 태황사로 돌아오게 했고, 태황사 총무스님으로 임명되었다. 첫째는 약7개월간의 행자생활로 어엿한 출가승의 모습을 갖췄고, 신도들은 그런 첫째를 주지스님의 딸이 아니라 진짜 스님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1년여 동안 총무스님으로써 태황사와 신도들을 이끌었던 첫째는, 주지스님과 나에게도 미션을 주었다. 특히 나에게는 매일 사마타를 하면서 부처님이 주신 미션까지 수행하도록 하여 방모로서의 자질을 갖추게 하였다. 특히 이번에 받은 미션으로는 방모로서 라이프너즈로서 애들 엄마로서 그리고 아내로서까지 한 번에 다 갖출 수 있도록 하는 엄청 어려운 것이 주어졌다. 아마 부처님께서 주시는 마지막 미션이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나의 미션이 아니라 여러 개를 받았다. 항상 그랬듯이 부처님께서 주시는 미션은 그리 녹녹한 것이 아니었으나 주지스님과 첫째의 도움을 받으면서 도망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마침내 모두 수행하게 됐다.
그중에 제일 어려운 미션이 있었는데,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신도의 가게에 가서 1주일간 함께 일을 하면서 그 신도가 직원들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손님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면서 사람을 보듬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라는 것이었다. 그 신도에게는 내가 직원도 아닐 뿐더러 스님을 일하게 한다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러워 할 것이기 때문에 내가 무엇보다 싫어하는 남에게 민폐끼치는 것을 해야 했고, 갑자기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과 하루종일 붙어있으면서 잘 지내야 했고, 더우기 그 신도에게 부처님의 미션을 전달해야 하는 임무까지 주어졌다. 그 신도분은 집과 직장이 충청도 아산에 있어서 매주 서울에 있는 불교대학에까지 와서 강의를 들을 수도 없었고, 토요일에도 식당문을 열어야 해서 월 1회 열리는 법회에도 참석하지 못하여 제대로 된 신앙생활이 불가능하여 인생치유프로그램으로 업장을 소멸하였으나 그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자꾸 업장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부처님의 미션이 주어졌고, 게다가 마침 그때 사기까지 당하게 될 우려까지 생겨 미션을 수행해야만 사기를 당하지 않고 그 수렁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음을 전달하는 게 내 임무였던 것이다. 1주일의 식당생활과 신도에게 미션을 전달할 때까지만 해도 잘 수행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다시 또 가서 그 신도분과 함께 1박을 하라고 하는 미션이 떨어졌는데 아무래도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부처님의 미션이라고 생각해서 무리해서 다시 방문을 했다. 아무리 스님이고 같은 여자이지만 본인의 방에서 함께 1박을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는지 그 전과 다르게 냉랭해졌고 나는 늦은 밤에 서울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이 사건으로, 아무리 부처님의 미션이라고 해도 예의를 갖추지 못한 미션은 다시 한번 확인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성공만이 나를 업그레이드시키는 것이 아니라 실패 역시 나를 성장시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신도분은 대출까지 받아서 투자했는데 모두 사기를 당했고, 태황사에 등을 돌렸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신도분이 걱정되고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갖고 있다. 그 전처럼 ‘안 하면 자기 손해지‘라는 생각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잘 지내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서울 방배동에 강남불교대학이 생기기 전까지는 요일과 상관없이 태황사에 출퇴근하면서 낮에는 절을, 저녁에는 집을 돌봐야했다. 그중에 가장 걱정인 것이 애들 교육이었다. 사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어느 정도 공부가 익숙해질 때까지 옆에 붙어앉아서 봐줘야 하는데, 거의 매일 출근하니까 애들을 돌봐줄 시간이 없었다. 퇴근하고 집에 오더라도 저녁 차리고 청소와 빨래가 더 시급했다. 그러다보니 방관 아닌 방관이 되어버려 애들의 학습능력이 매우 떨어졌다. 그렇다고 해도 남편은 애들을 학원이나 과외를 보내는 것은 더더욱 애들을 망치는 길이라고 하여 완고하게 보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다보니 첫째가 삼수를 해서도 대학에 가지 못하게 됐고 계속 방황만 하다가 내가 붙잡고 1년반 동안 수능공부를 시켰는데, 수능시험을 2개월 앞두고 그동안 거짓으로 공부를 했노라며 무릎꿇고 읖소를 하는 것이었다. 약 2년간 잠도 1~2시간 밖에 못 자면서 공부를 봐주다 보니 내 체력은 엉망이 되었고, 마치 뒤통수 맞는 것처럼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아이들의 생모인 방훈 방모님이 살아계셨을 때, 서원사에서 오랫동안 집안일을 해주셨던 분이 어느 날 주지스님에게 연락이 와서 애들이 보고 싶으니 태황사에 방문해도 되겠냐고 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그 분의 남편은 고위공직에 계시다가 퇴임하셨고 자녀분들을 모두 독립하여 심심풀이로 서원사에 파출부로 일하시면서 방훈방모님이나 아이들과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별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막상 부부가 함께 오셔서 예전 서원사 때의 이야기를 하시고 애들도 그분들과 살갑게 대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나만 외톨이된 느낌과 함께 나는 어렵게어렵게 엄마가 되어가는 중인데 마치 내쳐지는 듯했다. 너무 슬펐다. 소유욕이 강한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그 분들도 그런 내 시선이 느껴졌는지 그 이후로는 찾아오지 않았다.
주지스님은 내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갑 속에 방훈방모님과 첫째가 같이 찍은 사진을 갖고 다니셨다. 그 사진은 방훈방모님이 주지스님과의 이혼을 결심하고 마지막으로 첫째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에 찍은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다시는 그런 슬픈 얼굴을 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항상 가지고 다니신다고 하셨다. 처음 몇 년동안에는 그 마음을 이해하고 그럴 수 있음을 인정했지만, 결혼생활이 오래 지속되면서 왠지 한 쪽 마음에 아직도 방훈방모님을 못 잊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속상했고 스스로 없애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전혀 그럴 기미도 보이지 않을 뿐더러 나와 방훈방모님을 비교하면서 나의 방모스럽지 않음을 지적하니 나는 더욱 그런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다. 부탁도 해보았지만 그렇게 가지고 다니는 이유가 내게도 그런 슬픈 얼굴을 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라고 하니 더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엄청 큰 부부싸움을 하게 됐고 본인 손으로 찢으라고 했더니 못한다고 하면서 나에게 하라고 해서 나는 약간 주저하긴 했지만 불씨를 끊어내야 한다는 생각에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남편이 좀더 가깝게 느껴졌고, 내게 하는 말들이 진심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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