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태황사 방모다

큰 딸, 서명스님

공부하는아이 2025. 5. 1. 22:24

이 아이를 떠올리면 가슴이 아프다.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은 것도 서러운데, 친할머니를 비롯하여 고모와 작은아버지들까지 어른들끼리 할 얘기를 초등학교 6학년밖에 안 되는 아이에게 해댔으니, 어린 아이가 받았을 충격과 상처가 가히 상상이 안 된다.

 

그런데다가 아버지는 어린 동생들을 위해서라며, 엄마를 잃은 상처도 아직 가시지 않았는데 덜컥 결혼까지 하시는 바람에 큰딸은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어린 동생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엄마가 생겼다고 좋아라 하지만, 사춘기에 들어선 본인은 도저히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물론, 보호자가 생긴 것이고 누군가가 엄마의 빈 자리를 채워준다는 개념으로 보면 나쁘지는 않지만, 그것이 엄마라는 자리에 생면부지의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문제다. 즉,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태어나고 자란 서원사를 떠나 노원구의 아파트에 살면서 이젠 친척들로부터의 상처는 안 받게 되었지만, 혼자 외톨이가 된 기분은 영 사라지지 않았다. 어린 동생들은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 엄마 엄마 하며 즐겁게 지내고, 아빠는 엄마라고 부르라고 종용하시고. 그런 상황이다보니 학교에서조차 반 친구들과 웃으면서 원만하게 지낼 수가 없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내 편은 없는 신세다. 그러니 성적은 당연히 바닥을 길 수 밖에 없었고, 휴식처는 오로지 책과 그림 뿐이었다.

 

1학년 2학기가 되자 다시 서원사에 들어갔지만, 학교는 노원구에 있는 중학교로 통학했고, 학교 아이들로부터의 왕따가 시작됐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가정에서의 문제가 본인에게는 더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서원사에서 다시 살게 되었지만 친척들은 왕래하지 않았다. 당연히 사촌들과도 만날 수가 없었다. 그렇게 1년 반 정도 지내다가 아버지는 서원사에서 쫒겨나 오봉사로 가시게 되었고, 가족은 동두천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갔다. 또다시 새로운 집과 새로운 학교에 내던져졌고, 여전히 책과 그림에 빠져 공부에는 관심이 없는 생활이 지속됐다. 그러면서 아버지와의 불화가 시작됐다. 엄밀하게 따지면, 중 1때부터 시작된 셈이다. 공부도 안하고 방은 더럽고 새엄마에게는 여전히 언니라고 부른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도저히 살 수 없는 환경에서 죽지 못해 살고 있으니 아버지에게 어떤 취급을 받든지 상관없어 보였다. 아버지는 장녀를 잘 키워놓으면 그 밑의 아이들은 저절로 자란다는 옛 어르신들의 말씀과 같이, 큰딸을 잘 키워보려고 공부도 시키고 여러가지 예의교육도 시켰지만, 이미 삐딱해진 아이는 아버지의 말을 듣기는 커녕, 집안 분위기를 더 험악하게만 만들었다. 동생들은 그런 언니를 보고 더욱 두려워하며 멀어졌다. 

성적이 좋지 않다 보니 좋은 고등학교에는 진학할 수 없어서 그 성적에 맞춰서 갈 수 있는 학교에 들어갔고, 아버지가 하시는 인생치유프로그램을 하면서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고3때 갑자기 학교에 있어야 할 아이가 오봉사로 찾아와서는 세계여행을 하고 싶다면서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아이를 진정시키고 자초지종을 물으니, 부모로부터 독립하고 싶다는 것이었고, 우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차근차근 생각해보자고 달래서 집에 보냈다.

그 이후에도 시험을 보고 성적표를 받아도 집에는 알려주지 않으니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시에서 열린 미술대회에서 대상을 받았고 심사위원이었던 홍대교수가 수능을 보기만 하면 홍대에 입학시켜 주겠노라는 확답까지 받아놓고도 수능시험을 치르지 않았다든지, 집에 유서를 써놓고 마포대교에서 자살하겠다고 엄포를 놓아 관할 경찰서에 지원요청하여 아이를 붙잡았다든지, 수능만점을 받고 싶다고 하여 1년반동안 밤잠을 1~2시간만 자면서 함께 수능준비를 했는데 9월에 갑자기 수능을 안보겠다고 한다든지, 등등 기이한 행동을 하여 남편과 나를 뒤흔들어 놓았다.

그러더니 더이상 부모님께 얹혀살지 않겠다면서 치킨집에서 아르바이트를 몇 개월동안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하더니 월급을 모아 웹툰작가가 되겠다며 2년제 대학에 들어갔다. 주소도 학교 근처 자취방으로 옮기고 1학기를 다니다가 방학 중에 동두천 집에 있었는데, 길에서 어떤 사이비종교 삐끼에게 휘말려 돌아가신 어머니 제사까지 지냈다. 아버지가 스님이신데....

 

그때 사실 우리도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방배동에 불교대학을 열었는데, 남아있던 10 몇명의 신도들도 다 떠나가고 가까이 있던 스님들과 사무장까지 모두 주지스님의 뒤통수를 치고 떠나갔던 때였다. 남편은 불교대학에서 먹고 자면서 그 일대를 돌아다니며 집집마다 전단지를 돌리고 다녔고, 한 번 나갔다가 돌아오면 온몸에 땀이 나서 입고 있던 옷을 모두 갈아입어야 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나는 무엇에 씌인 것처럼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시계추처럼 출퇴근만 반복하고 불교대학의 발전에는 실낫정도의 도움도 되지 않았다. 다른 길을 가고 있던 이원일 거사님의 소개로 세 명의 여자가 와서 인생강의도 듣고 유튜브 촬영에도 도움을 주었으나 그것이 지속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큰딸에게 손을 내밀었다. 네가 와서 우리 좀 도와달라고.

 

큰딸은 다니던 학교를 자퇴하고 홍보실장이 되어 불교대학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물론 인생치유프로그램의 라이프너즈 역할도 하면서. 딸아이는 홍보활동에 혼신을 다했다. 온갖 맘카페, 불교모임카페에 가입하여 글을 남기고, 카드뉴스라는 것을 만들어 각종 SNS에도 불교 가르침을 옮기고 다녔다. 그러다가 우연히 택시를 탔는데, 기사님이 예전에 오랫동안 홍보를 했던 분임을 알게 되어 우리의 홍보팀에 스카우트하여 서울의 3개 주민센터에서 강연회도 열었다. 이 모든 홍보활동은 큰딸아이가 중심이었다.

프로그램의 라이프너즈 역할에도 아주 열심이어서 낮이든 밤이든 문의전화와 상담전화를 둘이서 번갈아가며 쉬지않고 받았고, 찾아오는 사람들마다 오랫동안 붙잡아 놓고 상담하는 데에도 지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태황사에서 하는 석가모니부처님 진신사리 친견법회가 유튜브에서 갑자기 인기를 끌어서, 우리는 태황사에서는 친견법회를, 불교대학에서는 인생치유프로그램을 진행하느라 경기도 연천의 태황사와 서울 방배동의 불교대학을 수시로 오고가며 밤낮없이 휴일도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불교공부와 본인의 인생치유도 놓지 않았는데, 그러던 와중에 갑자기 출가를 해야겠다며 몇 군데 비구니교육을 하는 사찰을 알아보더니 가장 크고 시스템이 잘 갖춰져있는 운문사라는 절에 출가해버렸다. 그러는 바람에 큰딸에게 크게 의지하면서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신도들은 떨어져 나갔고, 한참 활기찼던 불교대학은 맨처음으로 돌아가 버렸다. 조금만 안정시켜주고 출가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7월에 출가했던 큰딸은 그 다음해 2월말에 드디어 연락이 왔고, 강원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을 간신히 설득하여 동생들까지 동행하여 은사님 절에 찾아가 데려왔다. 태황사로 다시 돌아온 큰딸은 운문사에서 받은 정원이라는 법명을 버리고 부처님이 내려주신 서명이라는 법명이 되어 태황사 총무스님이 되었다. 행자교육을 마치자마자 태황사에 왔을 때에는 출가정신이 칼날 같아서, 아버지가 서울 불교대학에 나가 계시는 동안 태황사를 단단하게 지켜주고 계셨던 본인의 할머니와도 첨예하게 부딪쳐서 중간에 아버지가 겨우겨우 중재해야만 조율이 되는 일도 여러 번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서명스님은 홍보도, 라이프너즈도, 총무스님으로도 훌륭히 해냈다. 그러나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그동안 많은 신도들과 방모인 나, 그리고 아이들까지 주변에 모든 사람들이 진행했던 인생치유프로그램을, 창시자인 군맹서진스님은 치유해줄 라이프닥터가 없어서 못하는 것이 항상 억울했다. 그러던 것을 딸인 서명스님이 라이프닥터까지는 아니지만 사마타를 통해 부처님의 인생치유를 직접 받도록 하여, 아버지인 군맹서진스님도 인생치유프로그램을 받을 수 있게 하고 부처님께서 주시는 미션까지 수행하도록 했다. 게다가 총무스님을 내려놓고 본격적으로 라이프닥터가 되고자, 더 깊은 인생치유를 위해 스스로 부처님에게 미션을 받고 그 당시 남아있는 모든 신도들에게도 부처님의 미션을 모두 수행하도록 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오봉사는 태황사로 사명을 바꾸고 석가모니부처님 진신사리탑은 완공하게 되었으며 요사채는 재건축하게 되어 완전히 탈바꿈 되었다.

 

그리고 본인은?

 

더 큰 꿈을 이루고자, 아버지가 졸업하신 일본의 동붕대학교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이제 2학년 밖에 되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아버지를 통해 배운 불교와 인생치유를 어떻게 하면 더 발전시키고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이게 할지, 인생치유와 불교심리학을 접목할 가능성이 있는지 등, 본인만의 길을 개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