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살아간다.
학교와 회사에서도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절이라는 곳은 그야말로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다. 그러다보니 서원사에서도 재벌 회장부터 월세조차도 내기 어려운 사람까지, 80대 노인부터 어린아이까지, 대학교수나 박사학위를 갖고 있는 사람부터 초등학교조차 못나온 사람까지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나를 처음 서원사에 발을 들여놓게 한 사람은 잠깐 아르바이트를 하던 불교출판사의 사장님이었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한지 얼마안되었을 때 어떤 절에 가보자고 했고, 거기에서 나는 법문이라는 것을 처음 들었다. 처음이라서 그런지, 내가 어떤 말씀을 들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 출판사에는 스님들과 불교신자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그중에 서원사에서 총무스님을 하시던 명안스님은 내게 서원사에 놀러오라고 하셨고, 내가 출판사 사장과 불화가 생겨 아르바이트를 그만 두었을 때 서원사에 발을 들여놓게 한 장본인이다. 서원사에는 명안스님의 부인과 아이들이 함께 살고 있었고, 주지스님의 가족과 불교공부를 하러 온 사람들이 한 건물에 모두 살고 있었다.
내가 서원사에 들어가기 1달 전에 각비스님이 먼저 들어와 있었고, 그 분도 가족들과 서원사 건물에 함께 살았다. 그 건물 안에서 여러 가족이 24시간 함께 생활했던 것이다. 밥도 같이 먹고, 회의도 하고, 그러면서 각자 개인 볼일이 있으면 외출도 하고, 때로는 각자의 손님이 찾아오기도 했다.
내가 처음에 갔다가 3일만에 쫒겨나고, 몇 개월 후에 다시 들어갈 때는 초등학교 친구와 함께였다. 스터디모임이 생겨서였다. 친구와 나는 각자 독방을 배정받아 공부할 때나 식사할 때 외에는 각자의 생활을 했다. 나는 회의나 주지스님 가족과 함께 있기도 했고, 친구는 다른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거나 개인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내가 주지스님 가족들과 가까워지자 친구는 집으로 돌아갔다.
서원사는 특이한 곳이었다. 절이면서도 가정집이고, 회사처럼 그곳에 몸 담고 있는 사람들이 회의를 하거나 어떤 목적을 함께 공유하고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면서도, 상점처럼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다른 목적을 갖고 드나들기도 한, 주택가 안에 있으면서도 동떨어져 있는 것 같은 희안한 공간이었다. 그러다보니 내가 그때까지 만나지 못했던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재벌총수와 그 가족들, 프랑스인 스님, 작두를 타던 무당, 어떤 인연으로 그곳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스님을 좋아하여 쫓겨난 여성, 스님이었다가 어떤 여성을 사랑하게 되어 속퇴한 사람, 무명배우들, 일본 술집에서 몸 팔던 여성들, 그외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그때는 주지스님이 한창 활발하게 활동하시던 때여서인지, 많은 일들이 펼쳐졌다. 잡지를 발행하고, 주지스님과 각비스님이 함께 사람들의 괴로움을 없애주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졌고, 전국에서 많은 스님들이 방문하기도 하고, 일본스님들도 오셔서 법문하시기도 했다. 그중에 사람들의 괴로움을 없애주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는데, 그 이름은 인생치유프로그램이다. 몸과 마음이 아픈 것처럼 인생도 아플 수 있다는 개념이 처음 도입되어 수유사거리 근처 큰 건물의 한 층을 임대하여 불교문화센터를 건립했다.
그 때 몸담고 있던 멤버들의 활발한 활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주지스님과 서원사 스님들의 승복을 만들던 분도 참여했고, 서원사 기존 신도들, 각비스님에게 선무도를 배웠던 사람들, 명안스님의 식구들과 지인들, 그리고 수유역과 수유사거리 근처에 붙여졌던 각종 홍보자료를 보고 찾아오는 사람들. 그중에 가장 비중이 컸던 것은 각비스님에게 선무도를 배웠던 사람들과 그 지인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배우부부도 있었고, 학교선생님들도 있었고, 조각가도 있었고, 또 그들이 본인의 지인들을 많이 소개해주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 지금도 아련한 쓰라림으로 남은 사람이 있다.
이 분은 학교 선생님이었다. 아마도 각비스님의 소개로 오게 된 분이었던 것 같다. 집과 직장이 경북에 있어서 자주 오지는 못했지만,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왔던 것 같다. 처음에 주지스님의 권유로 1달 정도 서원사에서 숙식하면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프로그램을 진행하자마자 며칠을 밥도 먹지 않고 울고만 지냈다. 그러다가 서서히 풀리더니 식사도 하고 우리들과 눈도 마주치고 대화도 했다. 사실 처음 봤을 때, 학교선생님이라고 하는데 얼굴빛이 너무 어둡고 얼굴이 구겨져 있었다. 그러다가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법문도 들으면서 안색도 좋아지고 구겨져 있던 얼굴도 서서히 펴지더니 웃음기가 돌기 시작했다.
인생치유프로그램은 그 사람의 가장 아픈 곳을 찾아가 그 상처를 드러내서 고름을 걷어내고 바람을 쐬게 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 사람의 치부를 건드리는 것 같아 상당히 조심스러워 함부로 말 거는 것조차 어렵다. 그래서 처음 진단과정에 있는 사람과 초기치유자의 경우는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면서 말도 조심스럽게 한다. 이 분도 프로그램 초반에는 거의 말도 잘 걸 수 없을 정도였고, "괜찮냐"고 묻기조차 어려운 상태였다.
그러다가 프로그램이 진행되면서 조금씩 표정이 풀리더니 사람들과도 편하게 대화하게 되었다. 어느덧 한 달이 지나고 직장으로 돌아가도 한 달에 한 번 정도씩 법문을 들으러 그 먼길을 마다않고 찾아왔다. 그러다가 주지스님께서 경기도 연천 오봉사로 들어가시자 한동안 못 오다가 어느 날 불쑥 찾아왔는데, 지인이 갑자기 사망하고 장례식에 갔는데 그 영혼이 본인에게 빙의된 것 같다고 했다. 며칠 동안 오봉사에 묵으면서 치유를 했지만 완벽하지 않았고, 지속적인 치유가 필요했다.
그 일이 있고부터는 정말 성실하게 포항에서 연천까지 빠지지 않고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사람들과 많이 편해지고 나와도 가까워졌다. 빙의도 완전히 없어지고 업장(인생의 병)도 좋아지려고 할 때, 또 한 번 고비가 찾아왔다. 주지스님께는 말 못하고 깊은 마음 속의 고민을 나에게 털어놨는데, 길을 잃은 것 같다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어줍지 않게 내 경험을 말하면서 나 자신에게 응원군이 되어주어야 한다며 테마를 주고 사마타를 해보라고 했다. 그러고는 직장으로 돌아갔고, 나는 주지스님께 여쭤보니 사람마다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르기 때문에 테마는 함부로 주면 안 되고 적확해야 한다고 알려주시면서, 그 분에게는 그 테마가 맞지 않다고 하셨다. 아니나 다를까, 그 분은 삼천포로 빠졌고 오히려 오봉사와는 멀어졌다.
그래서 주지스님과 나는 한달음에 포항으로 달려갔고, 내 잘못을 설명하고 주지스님께서 다시 테마를 수정해주시고 다시 치유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그 분은 업그레이드 되었고, 그 사건을 계기로 포항에서 스터디 모임이 만들어졌다. 그 분들은 지인들에게 권유하여 사람을 모으고 장소를 섭외하여 주 4회 모임을 가졌고, 주지스님과 나는 1박2일의 일정으로 포항으로 출장을 갔다. 그 스터디모임으로 그때 모인 사람들이 지속적인 신앙생활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 불자님은 신앙이 더 깊어졌다.
주지스님께서 지도하시는 신앙생활은 사비다라는 활동을 하는 것인데, 사마타 비파사나 다나바라밀을 줄인 말이다. 사마타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기도이고, 비파사나는 법문을 듣는 것이고, 다나바라밀은 보시하는 것이다. 그 중에 다나바라밀을 하는 날을 우리는 해신일이라고 하며, 1달에 한 번 모두 모여서 하루종일 사마타 비파사나 다나바라밀을 한꺼번에 한다. 그때 모인 신도들은 전국에 흩어져서 살고 있어서 1달에 한 번 여행오듯이 가족들을 대동하여 큰 잔치를 하는 것 같았다. 물론 부부가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한 경우가 많아서 그것이 가능했을 수도 있다. 셋째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모여서 일정을 진행하다 보면 오후 5시가 넘고 저녁회식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저녁식사를 하면서 술도 한잔 곁들이기도 했다.
주지스님을 제외하고 그 때 모인 신도들의 연배가 40대 전후로 모두 비슷하다보니 더욱 친밀감이 생성된 듯하다. 그때 주지스님의 제자스님으로 계셨던 스님도 속가 나이는 우리와 비슷했는데, 신도들은 그 스님과 이 분을 자주 연결시키곤 했다. 그러다보니 주지스님도 두 분을 연결시켜주려고 독려했다. 포항까지 찾아가서 연결시켜 주기도 하고 우리 집에 초대해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면서 두 분이 가까워지도록 오작교 역할을 했다. 그러던 중 드디어 두 분이 결혼까지 하게 됐고, 오봉사 근처 아파트에서 둥지를 틀게 되었다. 흔히 하는 웨딩홀에서의 결혼식은 하지 않았지만 혼인신고를 하고 신도들 앞에서도 정식 부부로서의 인사도 빼놓지 않았다.
그렇게 1년 정도 신혼생활을 하던 중, 서서히 불화가 시작됐다. 주로 그 스님이 불자님과 그 친정가족을 배려하지 않는 것이 주된 요인이었다. 주지스님은 중매역할을 한 책임을 지고 두 사람을 중재하셨다. 그런데, 결국 도저히 중재가 안 되고 두 사람은 이별하게 되었다. 당연히 그 불자님은 고향으로 내려가셨고, 오봉사와의 연락도 끊어졌다.
그렇게 지내던 중에 오봉사가 재정적으로 어려워져 직원들에게도 급여를 주지 못하는 상황까지 오자, 서서히 오봉사 식구들은 떠나갔고 사무장으로 있던 사람은 근로복지센터에 주지스님을 고발하여 퇴직금까지 뜯어갔다. 뭐가 뛰니 뭐도 뛴다는 식으로 그 스님은 본인도 퇴직금을 달라고 했고, 급여를 받고 고용됐던 직원이 아니기 때문에 퇴직금을 줄 이유가 없다고 하여 거절했더니 그 스님은 오봉사와 관련이 있는 모든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주지스님과 나를 욕하고 다녔고, 그 나마 남아있던 몇 안 되는 신도들조차 등을 돌렸다.
그렇게 어려운 상황이 되자,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제자라는 사람이 우리를 더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모습을 보고, 주지스님과 나는 뒤통수 맞는 기분이었다. 이런 사람인줄 모르고 그 불자님에게 가까워지기를 권하고 결혼까지 하게 했으니 너무 미안하고 어떻게 해야 그 분의 상처가 조금이라도 나아질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 분이 다니셨던 학교에 연락하여 수소문을 했지만, 아무리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교육청에 문의했는데, 아무래도 퇴임하신 것 같다는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얼마나 힘드셨으면 그렇게까지 하셨을까.
마지막에 근무하셨던 학교를 어렵게 찾아서 연락을 했는데 그 불자님의 연락처는 개인정보이기 때문에 알려줄 수 없다고 하여, 편지와 책을 보낼테니 전달해줄 수 있겠느냐는 요청에 허락받아 주지스님의 책과 편지를 보냈다.
그로부터 10년 가까이가 지났다. 지금까지도 그 분에 대한 소식은 전혀 알지 못한다. 혹시 하는 기분으로 예전 주소를 샅샅이 뒤져 내 편지와 최근에 나온 주지스님의 책을 보냈다. 물론 답변은 없다. 하지만 시절인연이 닿아 그 분과 연결이라도 된다면 꼭 사죄를 하고 싶고, 용서는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도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인줄 몰랐다고, 정말 죄송하다고"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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