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태황사 방모다

100일 기도

공부하는아이 2025. 4. 11. 14:29

우리는 2018년 1월에 서울 방배동에 포교당을 개원했다.

 

2009년에서 2010년 사이에 만들어진 인생치유프로그램을 진행했던 사람들이 거의 10년 가까이 유지하면서 지탱해왔는데, 2017년부터 서서히 인원이 줄어들더니 2018년에 그나마 남아있던 신도들도 모두 발을 끊었다. 한 부부만 빼고.

 

2018년은 우리에게 많은 상처를 남겼다. 가까이 있던 스님과 직원도 배신하고 나갔고, 남은 신도들도 비난하면서 떠나갔다.

 

그런 와중에도 주지스님은 다시 일으키고자 방배동에 강남불교대학이라는 이름의 포교당을 열어 유튜브를 시작하고, 주변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전단지와 포스터를 붙이고 불교강의를 시작하셨다. 1년여동안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떠나가면서 남긴 상처를 삮히면서도 한편으로는 큰딸에게 도움의 손을 뻗었고 프랑스에서 태권도 국가대표였던 기욤씨가 인생치유프로그램의 다나바라밀을 수행하기 위해 프랑스에 갔다가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강남불교대학 홍보에 합류되었다.

 

젊은 두 사람이 합류되자 홍보활동이 활기차졌다. 서울의 3개 구민회관에서 강연회를 열고 온라인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유튜브에 구독자가 증가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연천의 오봉사(태황사 전신)에 석가모니부처님 진신사리 친견법회가 유튜브를 통해 알려지자, 전국에서 불교신도들이 오봉사에 진신사리 친견을 위해 모여들었다.

 

주지스님, 큰딸과 함께 우리는 연천 오봉사와 방배동 강남불교대학을 수시로 오고가며, 진신사리 친견법회와 인생치유프로그램을 진행하느라 그리고 문의전화를 밤낮없이 받아내느라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며 보냈다. 밥 먹는 시간, 잠 자는 시간, 쉬는 시간도 반납해야 했다. 

 

그렇게 석가모니부처님 진신사리 친견법회는 1년 넘게 지속되었고, 그 덕분에 유튜브를 통해 인생치유프로그램 진행자가 100여명이 넘자, 신도회가 결성되고 새로운 법회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고 효란큰스님과 주지스님의 숙원사업이었던 석가모니부처님 진신사리탑이 드디어 건립되었다. 

 

진신사리탑이 건립되고 새로운 법회가 만들어져 활성화를 모색하던 중, 신도회장이 회장이라는 위치를 이용해 신도들에게 투자명목으로 사기행각을 벌인 것이 발각되었다. 처음엔 신도들의 피해를 줄여보고자 회장을 불러서 상환을 요구했고 일부는 상환받았으나 한 신도분의 사기금은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신도들의 신뢰도는 나락으로 떨어져버렸다. 나중에 알고보니 신도회장은 우리 신도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사기를 쳐서 결국 교도소행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처음엔 신도들만 피해를 입고 태황사에는 아무런 피해가 없는 줄 알았다. 태황사에 재정적인 피해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 과정 중에 신도회장이었던 그 사람이 태황사 전체 신도 명단을 가져다가 무슨 짓을 했는지, 태황사에서 보낸 안내장과 전화에 응답이 없었고 인생치유프로그램을 마치고 유지하고 있던 신도들도 태황사에 대한 믿음이 떨어졌다며 발길을 끊게 되었다. 그래도 몇몇 분이 남아계셨는데, 주지스님과 태황사 모든 멤버는 남아있는 신도분들을 밀착 케어를 하여 조금씩 단단해져 갔다.

 

이때 다시 한번 주지스님의 아이디어로 100일 기도를 실시하게 됐는데, 문제는 100일동안 매일 정진해주실 스님들을 찾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지스님은 많은 시주금을 미끼(?)로 몇몇 스님들께 제안하셨는데, 시주금은 미끼가 되어주지 못했다. 그래도 서원사 시절에 인생치유프로그램을 하다가 출가하시게 된 비구니스님 한 분과 방배동에서 인생치유프로그램을 하다가 중단하셨던 비구스님 한 분이 흔쾌히 승낙해주셨다. 그래서 수능일을 기점으로 100일간의 일정이 정해지고 비구니스님께서 공양주(스님들 식사를 담당해주시는 분)도 섭외를 해주셔서 유튜브에도 대대적으로 홍보를 시작했다.

 

그 무렵 어떤 스님이 불교대학으로 연락이 왔는데, 본인은 터키인이며 한국에서 스님이 되고 싶다면서 방문하겠다고 했다. 그리고나서는 약속된 날에 오지도 않고 연락도 안되서 실없는 사람인가보다 했다. 그런데 몇 달 후, 다시 연락이 왔고 불교대학으로 찾아왔다. 사실 본인은 지금 화계사에서 행자교육을 받고 있는 중이며, 비자문제로 잠깐 나갔다가 들어오느라 약속을 못 지켜서 죄송하다며 행자교육은 다 받았고 조계종에서는 스님이 되고 싶지 않아서 다른 종단을 찾고 있던 중에 태황사를 알게 되었다고 하면서 태황사에서 스님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주지스님은 흔쾌히 승낙하셨고 며칠 후 태황사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 터키스님은 스님이 되기 전에 북경대를 다녔고 코로나 때문에 졸업은 못했지만 수료는 했으며, 어려서부터 동양문화권에 관심이 많아 한국어공부와 일본어공부를 해서 한국어는 5등급까지 일본어는 능력시험 2급까지 획득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는 수월하게 소통이 가능했으며, 영어도 가능하여 프랑스스님과는 영어로도 소통하곤 했다. 그렇게 태황사에서 불교공부와 홍보에 대한 회의에도 참여하던 중, 100일기도에도 도움을 받기로 하였다.

 

그래서 비구스님 한 분이 4시간, 비구니스님 한 분이 4시간, 그리고 프랑스스님과 터키스님이 번갈아서 2시간씩 총 12시간을 정근하고 공양주까지 모든 준비가 완료되어 어느덧 100일기도가 시작되는 날, 사고가 터졌다. 100일기도 시작하는 첫 날 아침, 비구스님이 아침공양을 마치시고 감기에 걸린 것 같다며 첫 기도는 다른 사람이 해달라고 하시고는 병원에 간다며 나가시더니 그 길로 귀가해 버리셨다. 코로나에 걸린 것 같다고는 하시지만, 그게 아닌 눈치였다. 그래서 얼떨결에 비구니 스님, 프랑스스님, 터키스님이 3교대로 2정근씩 하기로 변경되어 1달정도 잘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사고가 또 터졌다. 터키 스님의 관광비자를 종교비자로 변경신청하여 서류를 제출하고 심사를 기다리던 중에 관광비자 만료가 되어 출국했다가 2일만에 돌아오기로 했다. 그래서 비행기티켓을 사주고 체류비용으로 신용카드와 핸드폰까지 주었는데, 약속한 날에 돌아오지 않고 핸드폰까지 돌려주지 않았다. 차라리 한 달 넘게 했는데 정근하기가 너무 힘드니 조절해달라고 하든가 다른 방법을 취해달라고 요청했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되어 비구니스님과 프랑스스님이 2교대로 3정근씩 하면서, 때에 따라 주지스님이 교대해 주시거나 서명스님이나 내가 한번씩 들어가기도 하면서 90일쯤 되었는데, 갑자기 비구니스님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되었다. 이젠 더이상 어디에다 손을 내밀 데가 없어서 난감해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10여년 전에 서원사에서 사무장을 하시다가 효란큰스님에게 서품을 받으셨던 염광스님이 태황사 납골당에 참배하러 오셨다. 그러자 비구니스님이 조금 있으면 주지스님이 들어오시니 뵙고 가라면서 붙잡았다.

 

사실, 염광스님은 오랫동안 서원사에서 사무장으로 계시면서 주지스님의 어려웠던 시절을 함께 보내셨다고 한다. 10여년 동안 사무장을 하셨으니 방훈방모님도 너무 잘 알고, 오봉사 납골당을 건설하게 된 과정과 감수까지 다 하신 분이었다. 방훈방모님께서 돌아가실 즈음에는 오봉사를 지키면서 효란큰스님과 큰방모님을 모시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주지스님의 권유로 스님이 되었는데, 주지스님은 염광스님에게 출가정신이 없음을 판단하시고 행자교육부터 다시 하려고 하셨는데, 염광스님은 주지스님을 오해하여 서원사를 떠나셨다고 한다. 그래도 아버지의 유골을 오봉사 납골당에 모신 까닭에 1년에 한 번씩 참배하러 왔는데, 그 때마다 주지스님의 눈을 피해 방문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10년을 보내다가 추석에 납골당에 참배하러 왔는데, 서원사 시절 함께 지내던 분이 비구니스님이 되어 태황사에서 100일기도를 하고 계신 모습을 보고 반가워 하며 인사를 했고, 비구니스님이 주지스님을 뵙고 가라는 말을 뿌리칠 수 없어서 기다리다가 주지스님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처음에 주지스님은 별로 반가워하지도 않고 오랜만에 봤으니 그래도 인사나 하자는 심정으로 대화를 하다보니 오래전에 염광스님에게 있었던 하심의 부재가 이제는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당장 태황사로 와서 남은 100일기도를 마치자고 권유하셨고, 그리하여 비구니스님 대신 염광스님이 정진에 들어가셨고, 100일기도는 끝까지 우여곡절 끝에 회향하게 되었다.

 

100일기도를 수능일에 잘 회향했고, 염광스님은 전라도 익산에 사찰을 개원하시려던 계획을 모두 접고, 지금은 태황사에 총무스님이 되어 열심히 주지스님을 보좌하고 태황사 발전에 열중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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